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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Life/Poetry

이수명의 '환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6. 4. 2.

환멸 <이수명>

개나리꽃이 진다. 개나리꽃을 잉태한 봄은 총력을 기울여 개나리꽃을 떨어뜨린다. 꽃이 지는 것은 꽃의 환멸 때문이다. 가장 완벽한 동의가 환멸이기 때문이다. 가장 완벽한 동의의 옷을 입고 푸른 잎들이 그 자리에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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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처음 봤었을 때, 모 CF의 멘트가 생각났다. '통 뭔 소린지(-_-)'
약 30분가량 곰곰히 생각하고 다시 읽어도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해설을 보았지만, 내가 느끼고 이해한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해설을 읽어봐야 나에게 도움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포기해버리고 생각의 뒷켠으로 밀어두었는데, 얼마전 세이클럽에서 대화를 하다가 생각이 나서 사람들에게 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3~4명이서 토론을 하면서 환멸이라는 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자기와는 맞지 않는 시는 애써서 읽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과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었다.)

확실히 혼자서 끙끙 앓는 것보다는 여럿이서 앓는 것이 나았다. 아주 약간의 시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고(물론 완전 딴판으로 이해했었을 수도 있다), 사람들과 토론을 하는 재미도 꽤나 쏠쏠했다.

그러다가 얼마전 원성 스님의 소설 '도반'을 읽으면서 '환멸이라는 시는 참으로 멋진 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도반'에서 주인공과 노스님이 대화하는 내용을 잠시 소개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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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느냐?"
"예쁘다, 향기롭다, 보드랍다, 그런 생각이 들지요."
"네 시선은 색에 마음을 빼앗기고 현재만을 바라보고 잇구나."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씨앗을오부터 생겨 나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하고 멸한다. 네가 가져다 주는 꽃을 보고 있노라면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그것들을 보면서 죽음이라는 것을 觀하게 되는구나. 우리의 눈은 꽃을 통하여 영원한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곧 시들어 썩은 다음 다시 흙으로, 물로, 바람으로 돌아가지. 영원한 것이라고는 오직 죽어도 죽지 않는 네 佛性인 게야."
"예..."
"허허허... 꽃을 보면서 죽음을 관하는 자가 몇이나 될꼬. 지원아. 모든 이들이 괴로워 울고 있을 때 마음의 평정을 찾아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가 바라보거라. 모든 이들이 행복에 겨워 웃고 노래를 부를 때 ~~~~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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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환멸'이라는 사전적 단어는 환상이 깨어짐 또는 환상이 깨어짐을 보고 느끼는 충격이라고 한다. 위의 시에서 환멸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에대한 깨달음'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이수명 시인은 봄날에 노오랗게 피어나는 개나리꽃을 보고는 깨달았을 것이다. 저 꽃은 곧 떨어질 것이며, 다시 흙이되고 내년에 초록색의 새싹을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최인호는 단편 소설에서 '우리의 인생은 물구나무 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점프를 하여 잠시동안 공중에 있는 상태다'라고 하였다.  왜냐면 물구나무 서기는 언젠가는 그만둘 수 밖에 없다.  점프 또한 마찬가지다 점프하여 공중에 있는 시간은 그야 말로 찰나의 시간이다.  언젠가는 땅바닥에 닿을 수 밖에 없다.  

정말 암울하다.  우리는 어쩌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암울하다라만 볼 수는 없다.  암울하다고 투덜대고 있을 동안에도 나와 그리고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은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으니까. 

스티브 잡스의 성공 요인에는 아마도 죽을 뻔한 경험 때문도 있을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한 냉철하고도 명확한 인식이 있었다는 말이다.   갑자기 이런 기억도 난다.  부대에서 친한 선임병의 수첩에서였던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었다"라고 ...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놀고 최선을 다해 즐기자. 그것이 곧 카르페 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