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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Life/Sundries

훈련소에서 썼던 일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0. 10.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나태의 교태에 빠진 윤정원, 정신차리라는 의미에서... 예전 블로그에 올렸던 것을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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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단에 들고갔던 수첩에 시간날때마다 틈틈히 메모했던 내용을 남김니다. 지금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사람들 만나고 하면 군대얘기 많이할 것 같은데, 나는 정말로 밖에 나오면 군대얘기는 많이 안해야지 하고 각오를 하고 나왔습니다. 대신 훈련받으면서 겪었던 모든 일은 글로 남겨두기로 했죠. 나중에 훈련이 빡셀때는 거의 일지를 적을 틈이 없더군요. 그리고 특기학교때도 하도 바빠서 거의 못적고. 수첩도 바닥이 나고 해서 10.5일까지만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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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
2시에 입대인데 아버지는 1시에 나를 데려다주시고는 그냥 가버리셨다. 섭섭한 마음이 앞선다. 하긴 내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괜히 내가 들어가는 모습을 봐봤자 기분만 더 우울해지실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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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
옆에 두 녀석에 코를 골아대는 바람에 잠을 거의 못잠.
난생 처음으로 헌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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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
무릎이 약간 쑤심
X-RAY, 소변, 안경검사, 군가교육
각종 더러움에 익숙해지자.
못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다. 안해서 못하는 것이다.
두려워하지말자. 궁금해하지도 말자. 닥치면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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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
화장실에서 대변기에서 본 문구 '네가 화장실에서 사색하는 동안 밖에 있는 사람 얼굴은 사색된다 -_-'

밖에서 놀던 생각따위 다 잊어버리고 싶다. 내가 제대할 때면 친구들은 졸업하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겠지. 나가서 바로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머리 썪히지 않고, 내가 진짜로 하고싶은 것, 진짜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자. 그리고 몸도 건강하게 유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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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
오늘은 내 생일이라는 생각은 빨리 접어둘 수록 내게 이로울 것이다.
오늘은 불합격자가 탈락하고 내가 진짜 군바리가 되는 날이다.
각종 물품을 보급받았다. 입대후 처음으로 심하게 굴렀다. 소대 재배치 후 담당 조교는 교육사에서 가장 악독한 놈이란다. 일명 조PD~

저녁 식사 후 소대로 돌아오던중 멋진 저녁 노을을 보았다. 평생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생애 최고의 생일선물이었다.

5일간 가입교대를 함께 했던 동기들과 모두 헤어졌다. 섭섭한 마음이 앞서지만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임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친했던 동기들과의 만남은 즐거웠던 추억으로 간직만해두자.

새로 배치받은 내무실에서 내가 연장자인듯 하다. 나이에 연연하지 말자.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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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3
날이 밝았다. 몸이 많이 피곤하고 졸립다. 무릎뒤에 땀띠가 심하다.

삭발을 했다. 그리고 칭찬(?)도 들었다. 머리숱이 상당히 많단다. 어쨌든 삭발을 하고나니 굉장히 상쾌하고 기분이 좋다. 머리를 감는 귀찮음도 해결되었다.

훈련받던 도중 반갑지않은 소식을 들었다. 추석 연휴 때문에 훈련기간이 2일이 늘어난다고 했다. 대범해지고 싶지만 짜증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본능이 내 이성과 감성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 같다.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르겠다.

나머지 보급품을 다 받았다. 우리나라 군의 보급실태가 얼마나 X같은지를 실감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코끝이 찡해진다. 이유는 딱 잡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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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
아침부터 몇몇 어리버리하고 띨띨한 놈들때문에 빡세게 기합을 받았다. 까짓 목소리 크게 내는게 뭐가 힘들어서 조PD의 성질을 건드리는지. 군대는 조직을 우선시하므로 나 하나 때문에 전체가 괴롭지 않도록 해야겠다.

매일매일 정신 차리고 긴장풀지 말자. 걷지말고 뛰고 허리는 곧게, 목소리는 크게, 동작은 빨리

바느질로 이름표를 꿰멨다. 처음엔 서툴러서 몇 번의 삽질끝에 요령을 조금 습득했다.
선임 차수들이 남긴 기록을 보니 내일부터 상당히 빡세진다고 한다. 단단히 각오해야겠다.

나도 훈련을 성실히 받고 후임차수들에게 당당하고 멋지게 기록을 남겨두고 싶다.

내가 무사히 훈련을 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자신감을 갖자. 자신감을 갖자. 나만 걱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만 훈련받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동기 몇명이 조PD에게 심하게 얻어터지고 기합받았다. 동기가 얻어터지는 것을 보니 겁도나고 화도 났다. 아마 나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심하게 기합을 주고 나서 조PD는 우리에게 말했다.

"조교들한테 비굴해질 필요도 없고 잘 보일 필요도 없다. 그저 시키는 것만 열심히 하고,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라."

심하게 굴려놓고 미안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에서 비롯된 변명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맞긴 맞는 말이었다.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해, 타인에게 부끄럽지 않기위해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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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5
아침에 입단식을 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 최악의 난이도로 굴렀다. 군화를 신은 발에는 물집히 잡혔고 무릎을 비롯한 관절이 쑤신다.
기합을 받고 내무실에서 다시 조PD에게 한 소리를 들었따. 역시나 조PD는 구구절절 맞는 소리만 했지만, 말처럼 그리 쉽게 되지가 않는거 어쩌나.

오후에는 학과수업으로 약 3시간을 보냈는데 상당히 재밌었다. 화생방 교육중 교관이 실수로 주사기를 자기 몸에 꽃는 바람에 수업을 도중에 마치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조PD가 또 한 번 폭발했다. 소대근무가 약간의 잘못을 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너무 오버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하자 윤정원

학과수업을 받던 도중 엄청 웃었다. 한 동기가 런닝셔츠를 거꾸로 입어서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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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
내 행동이 너무 굼뜨고, 긴장이 너무 풀린 것 같다. 정신차리자.

일지를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줄어들고 있다. 바쁜 일과에 천성적으로 게으른 행동 때문일 것이다. 제발 빠딱빠딱 뛰자.

오늘은 조PD가 그냥 넘어가나했더니만 결국 점호때 걸려서 빡세게 굴렀다. 조PD같은 완벽주의자도 드문것같다. 아마 아버지와 꼼꼼함의 레벨이 동급이거나 그 이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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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
아침부터 빡세게 굴렀다. 그리고 총검술을 배웠는데 또 한 번 빡세게 굴렀다.

이렇게 빡세게 구르고 구르다 보니 전신이 쑤시고 피부가 가려운 곳이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이런것보다 더 짜증나는 것은 내 이성과 감성이 메마르고 있다는 것이다. 항상 바쁜 일과에 또 기합에 쫓기다보면 그저 먹고싶다, 자고싶다, 쉬고싶다 등의 본능이 내 머릿속을 지배해 버린다.

따라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도 이루어지지 않고, 감성도 메말라버린다. 어쩌면 이런 것은 훈련병 때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신경이 훈련에 집중되어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그게 너무 싫다.

총검술을 배우면서 내가 느낀 점은 과연 내가 전쟁 발발시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과연 그 동작으로 사람을 찔러 죽일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내가 전쟁시에 용감하게 싸울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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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
아침점호구보때 죽도록 기합받았다. 그리고 오전 학과시간에 교관이 계속 집생각을 나게해서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오후에 약간의 휴식시간때 동기들과 잡담을 하고 좀 웃고나니 몸이 피곤했던 것은 금방 잊혀졌다. 다들 훈련소 때가 차라리 더 낫다고 하는데, 오늘 확실히 인정하게되었다. 도수체조 시간은 의외로 재밌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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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
미리 정해놓은 한계는 진짜 한계가 아니다. 진짜 한계는 오직 신만이 알고있다. -조PD가 한 말에 덧붙여 씀-

맨손군장구보를 했다. 아침에 몸이 무거워 걱정을 했지만 낙오되지 않고 뛰었다. 그러나 우리 소대는 줄도 못 맞추고 목소리도 작아서 조 PD에게 욕만 먹었다.

게다가 도수제식 때는 내가 잘못해서 조교한테 특별 교육도 받았다. 기분이 X같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정신차려라 윤정원

군번을 받았다. 내 군번은 03-7000XXXX이다. 이제 내가 군인이 되었다는 것이 더욱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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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
날씨가 장난이 아니다. 일교차가 상당히 커서 감기환자가 속출하고 있다. 나는 목만 쉬고 아직 감기 기운은 없다. 항상 청결하게해서 감기+천식 콤보를 예방해야겠다.

태권도를 배웠다. 뱃살 때문에 발차기가 안된다. 주말이라 그런지 자유시간이 평소보다 많다. 간만에 느껴보는 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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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
일요일이다. 교회에가서 초코파이와 콜라를 먹었다. 나는 교인이 아니지만 교회에 다녀오니 마음이 안정된 것 같다. 역시 종교의 힘이란... ... 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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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새벽에 불침번을 서고 아침에 급양을 하다보니 무척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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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총검술 때 감점표를 뺏길 뻔하다가 안뺏겼지만 결국 내무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감점표를 뺏겼다. 씨발 억울해 미치겠다. 1소대장 중위새끼 성격 XX같다.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피곤하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쳤다. 이상태로 가다가는 과락당할지도 모르겠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자신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자.

감기 기운이 있다. 기침이 나고 목이 약간 아프다. 천식이 같이 발병할까봐 겁난다.

특별내무교육 이론시험 과락자가 우리 내무실에서 4명이 나왔다. 조PD가 극도로 분노한 상태다. 오늘 저녁에 각오하란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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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특기적성검사 우수자로 뽑혀 관제,통제병 선발을 위한 정밀신검을 받았다. 덕분에 오늘 아침 유격체조 4시간을 빠졌다. -_- 시력 테스트와 청력 테스트를 받았는데 결과는 그리 좋을 것 같지 않다. 관제특기를 못받더라도 110명중 60명이 관제,통제병으로 빠지면 50명이 남는데 그중 5명이상은 총무특기 이외의 특기지원을 했을 것이고 따라서 45명중 40등안에만 들면 총무특기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초무특기를 받아서 김해 진주 사천 대구에만 떨어지면 비교적 성공적으로 훈련단 생활을 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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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4
과음하지 않는다.
필요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사나이라면 외강내유
효도한다
한계를 뛰어 넘는다.
부지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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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이제 행군, 완전군장 구보만 남았다. 내무실 분위기도 많이 화기애애해졌다. 하지만 그래봤자 이등병일 뿐인데... 내가 너무 냉정한 것일까? 제대하고 동기들 몇명과 연락이 될까? 이런저런 생각만 나를 괴롭힌다...... 다들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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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
나에게 관제특기가 떨어졌다. 황당하고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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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4
드디어 수료다. 기분이 참 싱숭생숭하다. 동고동락했던 동기들과 헤어지려니 섭섭하기도 하고, 수료해서 훈련단을 뜬다고 생각하니 시원하고, 이제 갓 이병이라 생각하니 암울하다.

윤.정.원  what do you wanna do?
앞으로 영어공부 열심히 하기
몸 관리 잘 하기
초심을 잊지마라
자신과 타협하지 마라
정직해져라
사나이 윤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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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5
특기학교인 정보통신학교로 옮겨왔다. 아직까지는 군기가 좃나게 널널하다. 다만 선배차수 놈들이 목소리 깔고 존대말 쓰는 것과 훈련단에서 배운것과 다른 것이 많다는 것이 짜증난다. 아직 관물함 정리와 계급장, 이름표 주기를 안했는데 바느질과 정리는 정말 훈련받는 것보다 더 싫다. 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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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
정통교 생활이 짜증난다. 자대가서도 이렇게 짜증나면 어쩌지? 내무실에서 동기들과 얘기하고 노는 것도 그다지 재미가 없다. 훈련소때의 그 재미가 그립다. 게다가 2주 혹은 5주 빨리 입대한 선배라는 것들이 들락날락 거리면서 지랄하는 바람에 할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관제특기 공부할 것은 많은데 선배라는 것드이 들어올때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나갈땐 '수고하십시오 선배님' , 똑바로 안하거나 늦게하면 실내화 걷어차고 관물함 부수고 정말 어이가 없다. 자대가면 지네들이나 우리나 다 쫄병신세인데 왜그리 괴롭혀대는지 모르겠다. 비굴한 새끼들

참고 견디자. 그리고 나중에 받은대로 밑에놈들한테 갚아주든, 아니면 잘해주든 일단 참고 견디자 윤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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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국군의 날이다. 민간인들에겐 평일이고 군바리들에겐 휴일이다. 오늘은 또 얼마나 선배들이 지랄을 할까, 아니면 얼마나 사역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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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선배들한테 존나 딱였다. 실내화 걷어차이고 관물함 폭파당하고  그.러.나.
훈련단때 현신이가 내게 해준 말이 생각난다. "나를 죽일수 없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나를 괴롭히고 나한테 지랄하는 사람들을 가능한한 조금만 미워하자. 나를 편하게 해주고 웃게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조금만 좋아하자. 어차피 25일후면 남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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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휴가가 한달여 남았다. 휴가를 나가면 무엇을 하지? 하는 고민보다 나이를 먹고 제대를 할 때 쯤엔 남들보다 2~3년 뒤쳐져있을 것이라는 끔찍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제대하면 나는 무엇을 할까? 컴퓨터 공부? 과연 내가 컴퓨터에 소질이 있는 것일까? 나는 과연 무엇을 하게 될까?

그리고 앞으로 휴가를 종종 나갈텐데 나가서 게임같은 것은 완전 손을 떼야 할까? 정말 어이없는 고민이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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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아침에 우리 내무실 교육생들에게 전화를 5분정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왜일까? 알량한 자존심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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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학교에서 쓴 수양룍

10월 8일 수요일 맑음

사람이 살다보면 서로 짜증을 내고 다투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부딪힘을 얼마나 현명하게 처리해가는가가 중요한 것 같다. 같은 말이라도 조금만 신경쓰면 얼굴 붉힐 일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뒤에서 험담을 하는 것은 남자 아니 군인으로서 절대 할 짓이 아님을 명심해야겠다.

오늘 내가 세치 짧은 혀로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는지 반성하며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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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금요일 맑음

내가 쓰는 내무실은 북향이다. 그래서 그런지 밤에 창밖을 보면 홀로 밝게 빛나는 별이 있는데, 그게 북극성이 아닐까 한다. 밤에 항상 밖을 보고 그리고 북극성을 보며 나와 가장 친한 친구 녀석을 떠올리곤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쭈욱 함께해왔던 그 친구놈도, 내가 고개만 까딱해도 아니면 몇발자국만 가도 보일 정도였고 북극성도 역시 고개만 까딱하면 내 눈에 들어온다. 그 녀석도 나처럼 늦게 군대에 가서 고생이 심할텐데 그저 몸 건강하길 바랄 뿐이다. 건강해라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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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1일 토요일 맑음

어제 쓴 내용에 이어 북극성에서 7시방향으로 내려오다보면 희미하게 빛나는 (정말 희미하게 빛나는) 별이 있다. 정말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을 정도인데 환하게 빛나는 별에 못지 않게 정이 간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약간의 동정심도 있는 것 같고, 왠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지켜봐주고 있다는 느낌도 있다. 또한 칠흙같이 어두운 곳에서 마지막 혼을 불사르고 꺼져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내가 늙어서 침침한 눈으로 밤하늘을 봤을때 저 희미한 별을 찾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고로 저 별을 본 다는 것은, 젊은 이들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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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일 월요일 비

참으로 오래간만에 비가 왔다. 기훈단 때는 비가 자주왔었는데 여기 정통교에 와서는 비가 한번도 오지않았었다. 따라서 날씨가 건조해지고 목감기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물론 날씨가 건조해서 빨래가 잘 마르는 것은 좋았다.

이렇게 오랜만에 비가 오는 날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그저 아무생각없이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다가 30분 정도의 낮잠을 자고, 저녁엔 친한 친구와 가뿐하게 소주 2~3병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내 신분으로는 그저 꿈만같은 얘기다. 그리고 내가 제대를 하고 세상사에 얽매이게 되면 비가오는 날의 재미 또는 낭만을 느낄 기회는 더욱 더 줄어들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내린 비에 나무와 꽃과 땅이 촉촉히 젖었고 내 가슴도 찡하게 젖어들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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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금요일

사천공항에 견학을 갔다. RAPCON에 갔다가 TOWER에 가지않고 BX에 가서 군것질을 조금하고 이것저것을 구경하고 왔다. 견학가기 전만해도 너무 설레고 맛있는ㄴ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했었는데 막상 나가보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남들은 부대 밖으로 조금만 나가도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진다고 그랬는데, 나는 그다지 그런 것을 못 느낀 것 같다. 다만 사천공항을 가며 버스를 탔는데 오랜만에 차를타서 그런지 멀미가 온 것을 빼고 말이다.

첫휴가를 나가게 되어도 먹을 것을 마구마구 먹는다거나 감격해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러지 말아야겠다. 의연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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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8일 토요일 맑음

자대가 결정났다. 내가 앞으로 2년여간 발을 붙이게 될 곳은 사천 제X훈련비행단이다. 우리 17XXX특기중 나와 같은 곳으로 1명이 더 가고, 1명이 XX, 1명이 XX, 1명이 X비행단으로 배속받게 되었다. 나와 사천으로 가는 동기의 연고지는 서울인데 다른 동기들에게 중부지방의 자리를 야보하고 사천으로 가게되었다. 요즘 아무리 교통이 발달해서 서울까지 4시간 안에 간다지만, 어느 누가 집과 먼 곳으로 가게되었는데 섭섭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같이 군생활하면서 정말 잘 해줘야겠다.
힘든 이등병 생활도 같이 보내고 조금은 더 여유로울 병장생활도 같이 하게 될 것이다. 힘내자 동기야!